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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건이란?> 

 

 

1968년 1월 21일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북괴가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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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관련 국가, 집단>

대한민국


피해 국가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 戰死


대한민국 제1사단 15연대 이익수 대령 戰死


대한민국 국군 장병 23명 戰死


민간인 7명 사망


총 사망자 32명, 총 부상자 52명


 

 

북괴

 

가해 집단

 

124군부대 소속 무장 공비 31명

 

공비 28명 사망

 

2명 도주

 

1명 생포


------------------------------------------------------------------------------------------------------------------------------------------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1967년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

 

 

 

또한 자유월남에 국군을 파병하여 공산군에 맞서고 있는 때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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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북괴에서는?>

 

 

김일성은 대한민국이 월남에 군을 파병, 미국에게 신무기를 공급받게 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자 김일성은 경제정책은 뒷전으로 하고 군을 키우기 시작, 군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는 때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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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북괴의 김일성이 일제시대 때 소련의 앞잡이 노릇을 할 때 함께 했던 동지들이 있다.

 

김정태, 허봉학, 김창봉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김일성은 북한 괴뢰 집단을 수립한 후에 이들을 '항일 빨치산 1세대'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해주게 된다.

 

또한, 위에서 말했다시피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는 김일성이 군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었던 때 였다.

 

그 때 김정태 조선인민군 민족보위성 정찰국장이었고

 

허봉학 조선노동당 직할 남조선국장이었으며

 

김창봉 북괴의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이었다.

 

※ 민족보위성 : 대한민국의 국방부


※민족보위상 : 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

 

※부수상 : 김일성은 당시 수상이었음. 부수상직은 김일성 다음가는 자리이고, 나름 실력자라 생각하면 됨.

 

 

 

이 사람은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이다.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이 정계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김일성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결국에 김영주는 김정일에게 패하고 말지만 이건 나중에 다룰 얘기니 생략하고...

 

여튼, 위에서 언급한 빨치산 1세대 세 사람(김정태, 허봉학, 김창봉)은 김영주를 아주 우습게 여겼다.

 

자기들이 김일성과 함께 나름대로 일제 때 투쟁을 같이 했었고

 

김일성이 군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정도로 김일성 계열 빨치산 1세대들은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짤은 박헌영과 여운형. 본문과 관계 없음)

 

북괴 내의 권력 구도가 개판이 될 때 빨치산 1세대 세 사람 중에 김창봉이 은밀히 말을 꺼내는데...

 

"동무들, 김영주 저 아새끼를 밀어내고 내가 후계자가 돼야 하지 않겠어?"

 

그러자 김정태, 허봉학 김창봉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자기들끼리 모의를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김정태 김일성의 허가 없이 단독으로 사건 하나를 꾸미게 되는데

 

이 사건이 바로 내가 지금 다룰 이야기인 1.21사건이다.

 

 

1968년 1월 13일 - 북괴 평양

 

조선인민군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김정태 조선인민군 124부대 소속 31명을 불러 은밀히 명령을 하달한다.

 

"청와대를 폭파하고, 남조선 대통령 박정희의 목을 가져와라."


 

 

이러한 명령을 받은 124부대 31명 특수부대원들은 PPSH-43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대한민국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여 개성으로 향한다.

 

※PPSH-43 기관단총

 

7.62mm탄을 사용하며, 35발 들어있는 탄창을 사용한다고 한다.

 

콜오브듀티2 소련으로 플레이해보면 나온당 

 

71발 들어있는 PPSH-41을 본떠서 만든 총이라고 한당

 

 

1968년 1월 17일 - 대한민국 법원리(삼봉산)

 

그들은 개성을 떠나 군사분계선 통과하는데 성공하고 대한민국에 잠입하게 된다.

 

그런데


공비들은 저기 사진 자료에 있는 법원리(삼봉산)에서 4명의 나무꾼에게 발각된다. (이들은 형제였다.)


이에 공비들은 그들을 생포하였고 공비들의 리더인 김종웅이 본부에 무전을 때려서는

 

"본부, 민간인들에게 발각됐다. 지시를 내려달라."

 

이에 본부에서 무전으로 답을 해줬는데 난수표를 담당하는 공비가 이걸 해석을 못 했다.

 

그러자 김종웅은 나무꾼 4형제에게 일본제 세이코 시계를 선물해주고서는

 

"이거 줄테니 경찰에 신고 ㄴㄴ해" 하고서는 갈 길을 떠난다.

 

나무꾼 4형제로서는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겠지만 이 때 부터 공비들은 작전 실패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무꾼 4형제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경찰에 "공비를 만났소. 공비가 침투했소." 하고 신고를 하기에 이른다.

 

무장공비 일행은 얼마 안 가 하늘에 헬기가 떠다니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들은 나무꾼들이 신고를 한 것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들은 나무꾼을 죽이러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조건 돌격 앞으로였다.

 

 

1968년 1월 21일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고개

 

무장공비가 침투했다는 소식을 들은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들은 비상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31명의 국군 복장을 한 총든 군인들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공비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조건 앞으로였다.

 

야밤에 무장군인들이 경찰에게 향하자 경찰들은 바리게이트를 친 후에 그들에게 물었다.

 

검정색 - 경찰 

빨간색 - 무장공비

 

"어디서 오는 부대입니까?"

 

"우리는 CIC방첩대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다. 길을 열어라."

 

"저희는 군부대가 움직인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 글쎄... 훈련 마치고 돌아 가는 길이라니까! 빨리 비키지 못 해!"


그 때였다.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보고를 받고 현장에 나타났다.


"어디서 오는 부대입니까?"


"우리는 방첩대다. 얼른 길을 열어!"


"기다리시오. 나는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 때였다.


대한민국 제1사단 15연대 병력을 태운 군용트럭이 현장에 나타났다.


그러자 무장공비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국방군이다! 쏴버려!"


이 한 마디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공비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PPSH-43기관단총을 사용하여 난사하고, 수류탄을 꺼내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세검정 고개를 지나가던 버스 한 대에 공비가 수류탄을 던져 민간인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당시 국군은 M-1개런드라는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공비들이 사용하는 PPSH-43이 35발 들어있는 기관단총인 반면

 

사건 현장에 급파된 15연대 소속 국군은 한 발 쏘고 장전하고, 한 발 쏘고 장전해야 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군대를 갔든 안 갔든 실감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상대는 두다다다다다 쏘고 있는데 아군은 '탕' 장전 '탕' 장전 하면서 쏜 것이었다.

 

여튼, 이 때 현장에서 공비들과 입씨름을 벌이고 있던 최규식 총경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여튼 공비들은 다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전혀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공비들은 하나같이 도주하기 시작한다.

 

 

사건 당일 박정희 대통령은 감기 기운에 약을 먹고 자고 있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터지자 잠에서 깨어났다.

 

그 때 경호실장 박종규가 들어오며 소리쳤다.

 

검정색 - 박종규, 김성은

빨간색 - 박정희

 

"각하, 큰일났습니다! 무장공비입니다!"

 

"아니 뭐라고?"

 

"아마 청와대가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수경사, 경찰에서 쫓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창문을 보니 수경사에서 쏘아 올리는 조명탄으로 밖이 환해 있었다.

 

그 때 국방부장관 김성은이 들어오더니

 

"각하, 이런 일이 나기 전에 대처했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그게 어디 김 장관 잘못인가. 그런데 어떻게 저 놈들이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글쎄 말입니다. 저도 상식 밖의 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대응매뉴얼을 대폭 손질 해야겠어."

 

 

(세검정 고개에서 공비들을 추격하는 경찰들)

 

여튼 국군과 경찰들은 무장공비들을 추격하기에 이른다.

 

국군은 사건 당일 무장공비 중 한 명이었던 김신조를 생포하는데 성공하고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기에 이른다. 2명은 탈출에 성공해 북괴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또한 피해가 컸다.

 

15연대장 이익수 대령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

 

국군 장병 24명 

 

민간인 4명 등 

 

32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MBC드라마 - 영웅시대에서 재구성하여 방영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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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결과>

 

 

생포된 김신조는 육군 방첩대에서 조사를 받은 후 기자회견을 가졌다.

 

다음은 김신조의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이다.

 

-성명과 연령, 본적, 주소는?

 

김신조, 27세입니다. 본적은 함북 청진시 어항동이고 

주소는 청진시 청암3구역 청양동 제3반입니다. 생년월일은 1942년 6월2일

 

-소속과 계급은?

 

조선인민군 제124군부대, 소위입니다.

 

-북한에 부모는 있는가. 그 밖의 가족들은?

 

부모님은 청진시에 계십니다. 

아버지는 김중엽, 어머니는 이분옥인데 직조공장 노동자입니다. 

경숙 등 3명의 누이동생이 부모님과 같이 삽니다.

 

-자하문(세검정 고개)에서 경찰과 충돌하기 전까지 군·경 수색대를 본 적은 없는가?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간첩작전을 벌이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당초 계획대로 내려왔는데 막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번 임무는?

 

박정희 모가지를 떼고, 수하간부들을 총살하는 것입니다.

 

-청와대 습격작전 계획은?

 

31명이 5명 내지 7명씩 6개조로 나뉘어 

1조에서 5조까지는 청와대의 1층, 2층, 경호실, 비서실, 정문위병소의 격파를 분담하고 

나머지 1개조는 습격이 성공했을 때 

청와대 수송부의 자동차를 탈취해 문산까지 나가 임진강을 도강하는 것입니다.

 

-성공할 줄 알았는가?

 

실패는 생각지도 않았고, 만약의 경우 죽음은 각오했습니다.

 

-지금 심경은?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좋습니다. 여기 인민들에게는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건 당시 조명탄을 쏴올려 공비를 추격하는데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 대대장 전두환 중령이었다.

 

※위 링크는 내가 쓴 글 아님

 

 


1.21사건 당시 생존하여 북괴로 돌아간 박재경은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되었다. (사진 왼쪽)

박재경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 방북 후 귀국할 때 김정일이 선물한 송이버섯을 대신 선물하였다.

 

 

 

 

 

사건 발생 이틀 후인 1968년 1월 23일

 

북괴군은 공해 상에서 미국의 푸에블로호를 납치한다.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미국은 이에 대한민국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구축함 3척을 파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1.21사건과 더불어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이 벌어지자 미군과 함께 북진하기 위하여

 

전군에 비상령을 내리고 명령만 내려진다면 당장에라도 북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 수록 미국이 강경한 자세가 누그러졌고, 결국 북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보복 차원에서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한 특수부대인 '실미도 부대'를 조직하였으나

 

이들은 뜻한 바를 이루지 못 하게 되었다. (실미도 사건)

 

 

 

이 사건 후 김정태는 또 무모한 사건을 계획하게 되는데, 이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자.

 

여튼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김정태, 허봉학, 김창봉 등 군부 강경파 세력은

 

그들이 그렇게 얕잡아보던 김영주가 김일성에게

 

"쟤네들이 청와대 습격사건, 삼척 울진 무장공비사건 등 계획한걸로 밝혀졌음 혼내주셈 ㅡㅡ"

 

이렇게 일러바쳐서 후에 숙청되었다.

 

 

 

1972년, 비밀 특사로 평양에 방문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김일성은 청와대 습격사건은 자신이 꾸민 일이 아니라고 말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과의 뜻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김신조는 대한민국에 귀순하여 현재 목사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김신조 일행이 법원리에서 본부에 무전 때렸을 때 공비가 해석하지 못 했었던 것을 국군은 단숨에 해석하였는데

 

그 내용은 "임무를 포기하고 속히 귀환하라."는 것이었다.

[출처] 1.21 청와대 무장공비 습격사건(김신조 사건)|작성자 ostre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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